2012년 9월 26일 수요일

기존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못들어간다?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기존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못들어간다?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아시는 분은 아시는 내용이죠.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가 어느날 꿈을 꾸었습니다.
웨슬리가 지옥문에 도착하여 어떤 사람이 지옥에 들어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천주교인도 있습니까?"
그런데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회인도 있습니까?"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장로교인도 있습니까?"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마지막으로 자기 교파를 의식하면서 물었습니다.
"웨슬리 교회 사람도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많이 있습니다."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웨슬리는 예기치 못한 말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래서 낙심하여 천국문에 가서 물어봐야 겠다고 생각하고
천국문 앞에 이르러 물었습니다.

"이곳에 웨슬리 교인들도 있습니까?" 그랬더니 안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더욱 놀라 낙심하여 묻기를

"그러면 장로교인은 없습니까?"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주교인은 있습니까?" 한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있는 겁니까?"

안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안에는 그리스도인 밖에는 들어오지 못합니다."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깜짝 놀라 잠을 깼습니다.

무슨 말 입니까?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장로교인? 아닙니다.
성결교인? 아닙니다. 순복음교인? 아닙니다. 천주교인? 아닙니다.
교파로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다윗이 가지고 있는 천국의 열쇠?   새언약~?



2012년 9월 19일 수요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에대한 반론-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안상홍님


하나님의교회에서는 유월절에 참예하라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유월절을 지킴으로 믿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안상홍님께서도 어머니하나님께서도 성경대로 유월절을 지키시는 본을 친히 보여주심으로 믿음엔 행함이 수반되어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에대한 반론-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안상홍님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지키라고 한적도 없고 또한 절기를 지켜서 구원받는것이 아니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고 하는 거짓주장에 대해서 반론

마26:17『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가라사대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웠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이제 님께서는 마태복음26장의 구절은 지워야 하겠군요

님은 없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성경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노릇입니다.

성경대로 행한다면 절기도 지켜야 하고 믿음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한쪽을 강조해서 다른 한쪽을 약화시키므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코자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절기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행위가 바로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부분만 강조해서는 안되겠지요

계14:12『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이처럼 계명도 지키고 믿음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만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약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라고 하였으니 귀신도 구원받았다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히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

이스라엘백성들이 여호와하나님을 믿기만 했지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겠습니까!!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뿌리는 예를 정하셨으니 당연히 믿음의 행위로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새언약유월절을 지키십시오

약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믿는다고 하여 자기자신을 속이는 분이 되시면 안되겠지요

약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제 예수님께서 지키라고 명하신 새언약유월절을 지키셔서

절기도 지키시고 믿음도 가지시는 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012년 9월 16일 일요일

'달력의 요일의 역사' 5,000년전엔 1년이 354일? - 하나님의교회,어머니하나님,안상홍님


안상홍님과 어머니하나님께서 재건하여 주신 초대 교회인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성경대로 일곱째날(토요일)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요일의 명칭이 쓰여지게 된 유래를 살펴봄으로 해서 첫째날은 일요일이며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복주신 날이 일곱째날 토요일임을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달력의 요일의 역사' 5,000년전엔 1년이 354일? - 하나님의교회,어머니하나님,안상홍님

로마황제 요일명 321년 도입, 태양력은 이집트인 첫 사용

예전에는 이맘 때만 되면 둘둘 만 커다란 달력을 옆구리에 끼고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흔했다. 하지만 개성을 중시하는 요즘은 달력도 주문 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1년 내내 봐야 하는데 기업에서 홍보용으로 뿌리는 달력을 걸어놓기는 싫어서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는 맞춤 달력을 서비스하는 업체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달력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을까?


요일은 로마시대부터

문헌상으로 한 주를 7일로 나눈 것은 성서가 최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쉬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주를 구성하는 7일에 대해 ‘요일’이라는 말 대신에 ‘첫째 날, 둘째 날,…, 일곱째 날’ 등으로 불렀고, 10계명에 따라 안식일인 일곱째 날을 신성시해 어떤 일도 하지 않고 무조건 쉬었다.

요일에 지금과 같은 명칭이 붙은 것은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AD 321년 매주 첫째 날을 휴일로 정하는 법령을 발표하면서. 요일의 명칭은 고대인들이 관찰할 수 있었던 태양과 달을 포함한 일곱 행성에서 따왔다.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눈 것은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점성술에서 유래했다. 일곱 행성이 돌아가면서 매 시간을 지배하며, 하루의 첫째 시를 지배하는 행성이 그 날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태양을 신으로 섬겨 태양의 날인 일요일을 휴일로 정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의 달력에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쓰고 있던 일주일을 도입했지만 요일의 이름은 바빌로니아의 점성술에 근간을 두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AD 321년 3월7일 첫째 날을 태양의 날로 선포하고 이 날을 예배일이자 공휴일로 정한 뒤 둘째 날은 월요일, 셋째 날은 화요일, 넷째날은 수요일, 다섯째날은 목요일, 여섯째날은 금요일, 일곱째 날은 토요일로 명명하는 칙령을 내렸다.

첫째 날(일요일)을 ‘태양의 날’이자 공휴일로 정한 것은 당시 로마인의 대다수를 차지한 미트라(태양신) 교도들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일곱째 날, 즉 토요일을 예배일로 지켜오던 유대인들과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에 반대했지만 교회 지도자와 미트라 교도 등 대다수 로마인은 칙령에 지지해 일요일 휴일이 서서히 정착돼 갔다.


태음력이 달력의 효시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에 따라 29일 또는 30일을 한 달로 정하고 12달을 1년으로 하는 태음력을 사용했다. 태음력에 따르면 1년이 354일이어서 조금씩 오차가 날 수 밖에 없어 때때로 윤달을 넣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고대 수메르인과 바빌로니아인뿐만 아니라 유대인, 그리스인, 중국인 등 세계의 많은 민족들이 이러한 태음태양력을 수천년 동안 사용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쓰는 음력도 정확히 말하면 태음태양력.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 공전주기와 흡사하게 1년을 365일로 정한 태양력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이집트인들이다. 그들은 나일강의 수위에 초점을 맞추어 1년을 12달, 한 달을 30일로 정하고 여기에 다시 5일을 더했으며 1년을 주기로 정확히 반복되는 나일강의 범람을 관찰해 달력을 만들었다. 이집트 천문학자들은 4년에 한 번씩 윤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신성한 달력’을 고수하는 사제때문에 해마다 6시간 가량의 오차가 나는 것을 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같이 착오가 나는 달력을 바꾸는 개혁은 로마 율리우스 시저 황제에 의해 이루어졌다. BC 46년에 만들어진 ‘율리우스력’에서 1년을 처음으로 현재처럼 365일로 정했으며 4년마다 하루를 더한 윤년을 만들었다. 비로소 과학적인 달력이 탄생한 것이다. 물론 율리우스력도 완벽한 달력은 아니었다. 4년마다 윤년을 정할 경우 1년에 실제보다 674초(0.0078일) 정도 차이가 난다. 달력을 만들 당시에는 무시할 정도로 작은 오차였지만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누적 오차가 10일이나 돼, 밤낮의 길이가 같은 춘분이 3월21일이 아닌 3월11일이 돼 버렸다.

마침내 로마교회가 달력 개혁에 나섰다. 1582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만들어 현재까지 사용 중인 그레고리력이 그것이다. 그레고리력은 율리우스력의 문제점을 보완해 100으로 나누어지지 않으면서 4로 나누어지는 해(96회)와 400으로 나누어지는 해 1회를 합해 400년 동안 97회의 윤년을 두었다. 그리고 누적오차를 바로잡기 위해 1582년 10월4일 다음날이 10월15일이 되도록 했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그레고리력을 만들었지?200년 동안 서유럽 개신교 지역과 동유럽의 그리스정교 지역에서는 계속 율리우스력 사용을 고집했다. 그러다가 서유럽지역은 18세기 말, 동유럽의 그리스정교 국가는 20세기에 이르러 그레고리역을 채택하면서 달력의 천하통일이 이루어졌다.

<도움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서호성 책임연구원>


*원어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할때 번역자들은 그 단어를 표준 국어사전에 입각하여 번역하기에 성경의 단어와 국어사전에 단어는 그 의미하는바가 동일함을 알려드립니다.

2012년 9월 13일 목요일

니케아 회의와 유월절 논쟁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안상홍님께서 회복해주시기까지 초대교회 새 언약 유월절이 패지되게 된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유일하게 새 언약 유월절을 성경대로 지키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참 진리 교회임을 깨달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니케아 회의와 유월절 논쟁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교회사 및 세계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획을 그은 니케아 회의(AD321년)는 당시로서는 처음 있는 세계적 회의였다. 유월절을 없애고 부활절을 지키자고 하는 것이 주된 의제였는데 이들이 말하는 부활절 즉 이스터(Easter)는, 북유럽에서 섬기던 봄의 여신 이스터의 축제일과 기독교의 부활절을 혼합한 절기였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절(Resurrection Day)은 무교절 후 첫 안식일 다음날(일요일)이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최후의 만찬을 행하시고 다음날인 무교절에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으며 안식 후 첫날 부활하셨다.

레위기 23장에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한 설명이 있고, 이러서 초실절(신약의 부활절)에 대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초실절(初實節)은 무교절 지나고 안식일 다음날(일요일)에 첫 이삭(열매) 한 단을 베어다가 제사장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절기이다. 하나님께 이 초실절 제물을 드리기까지는 햇곡식을 먹지 못하였고, 초실절 제물을 드린 후에야 햇곡식을 먹을 수 있었다.

구약의 모든 절기가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님의 행적으로 성취된바,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성만찬을 하신 후 다음날인 무교절(1월 15일)에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영혼이 떠나셨다.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일요일) 부활하셨으니 이는 구약의 초실절을 이루신 것이다(마 28:1, 막 16:1 눅 24:1, 요 20:1).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부활하시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예수님 이전에 죽었던 성도들이 따라서 부활 받게 된 것이다(마 27:50, 고전 15:20 참조).

그러므로 신약의 부활절은 구약 초실절의 실상이었고 그 날짜는 유월절과 무교절 후에 오는 첫 안식일 다음날(일요일)이었다.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유언에 따라 1월 14일 저녁에 유월절을 지키고, 다음날인 15일에는 무교절을 지켜 금식하고, 또 무교절 후 안식 후 첫날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지켰다(행 20:6∼7절 참조).

그런데 일찍부터 다신교 사상을 받아들인 로마교회는 당시 부활절과 비슷한 시기에 북유럽에서 지키던 봄의 여신 이스터 축제일을 부활절과 접목시키며 유월절을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현재도 부활절에 계란에 색칠을 하거나 계란을 먹는데 이도 역시 봄의 여신 이스터를 축하하는 행사이다. 부활절 날짜를 정하는 기준이 되는 유월절, 무교절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 그들은 부활절 날짜를 정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논리를 전개하여 부활절 날짜를 정하였으니 곧 ‘춘분 후 만월 다음의 첫 일요일’이었으며, 그 일요일의 3일 전인 금요일부터 부활절까지 금식을 한 후 이 날(일요일)에 성찬식을 하였다.

이러다 보니 동·서방 교회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유월절을 지키는 교회에서 유월절과 금식하는 무교절까지 지키고 난 후 로마 지역으로 여행을 갔을 때, 이제서야 금식하며 성찬식 하는 장면을 보며 매우 놀라워하게 되었다.

로마교회에서는 2세기 중엽부터 유월절을 지키지 않고 부활절을 지키는 관습이 시작되었다. 155년경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이 로마교회 감독 ‘아니케터스’와 유월절에 대한 문제로 토론하였다.

폴리갑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 그리고 여러 사도들과 함께 매년 유월절을 지켜왔노라고 하면서 유월절이 예수님 때로부터 내려온 전승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모임에서 양편은 서로를 설득할 수 없었다.

이 폴리갑은 사도시대 때부터 신앙을 가졌던 사람으로 장수하였다. 이 때는 이미 고령이었고 얼마 후 순교당하였다.

197년 경에는 로마교회 감독 빅터가 유월절을 지키지 말고 부활절을 지키자고 주장하는 ‘도미닉의 규칙’(Dominical Rule: 주의 규칙)을 따르도록 여러 교회에 압력을 가했다. 서방 교회들은 빅터가 주장하는 도미닉의 규칙을 따르기로 하였지만 일찍이 그리스도 교회의 초기 기반이었던 아시아의 교회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에베소의 감독 ‘폴리크라테스’는 빅터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은 가문에서 여덟 번째 감독직을 수행하는 사람이며, 사도 요한과 사도 빌립 등 여러 사도들로부터 받은 권한을 행사하고 있고, 적어도 어느 것이 바른 규칙인지를 알고 있다며 유월절을 지켜야 함을 강한 논조로 설명하였다.

또한 팔레스틴과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나르시수스, 가이사랴 교회의 감독 데오필루스, 두로 교회의 감독 카시우스, 클라루스 및 아시아의 여러 감독들은 폴리크라테스의 편지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 서신의 사본들을 모든 교회에 보내어 쉽사리 길을 벗어나는 심령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쓰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우리와 동일한 방법으로 유월절을 지키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서신들을 보내었고 또 그들도 우리에게 서신을 보내어 모두가 같은 시기에 한 마음으로 거룩한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p298, 은성)


사단은 이와 같이 생명의 법인 유월절을 파괴하기 위해 끊임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그 불법자는 결국 로마 황제의 힘을 이용하여 생명의 진리를 없애버렸으니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주재한 니케아 회의를 통해서였다.

주후 325년 5∼6월 니케아 지방에서 열린 이 종교회의는 콘스탄틴 황제가 의장이었다. 이 회의에서 유월절을 폐지시키고 부활절을 지키기로 결정하였으며 부활절 날짜는 그들이 예전부터 주장해 오던 대로 춘분 후 만월 다음의 첫 일요일로 정했다. 유월절과 무교절을 폐지시켜 버렸기 때문에 성경에 정해진 부활절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니케아 회의에서는 당시, 예수님은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던 아리우스를 추방하는 문제, 그리고 교회의 조직을 정비하는 내용 등을 안건으로 상정하여 처리하고 폐회하였다.

이리하여 2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던 유월절 논쟁은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라”고 다니엘서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성취시키고서, 4세기에 와서야 일단락되었다.

니케아 회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콘스탄틴 황제의 개입으로 인해 로마교회는 권한이 강화되었고 황제는 교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서로가 추구하던 바를 이룬 것이다.

이제 로마 황제의 권세를 등에 업은 로마교회의 독주를 막을 자가 이 땅에는 없었다. 모든 교회들은 로마교회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으면 이단이 되어 박해를 당해야 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성도들은 사막으로, 산중으로, 동굴 속에 숨어서 유월절을 지켜야 했다. <교회사 초대편>(283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콘스탄틴 대왕의 힘으로 교회에 평화가 찾아온 후로 교회의 수준이 갑자기 저하된 것을 한탄하여 광야의 금욕 생활에 나간 사람들이 허다하였다”

사단은 니케아 회의를 통해 일단 승리하였으니 성경에 기록된 바 “이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단 7:21) 하신 말씀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마귀와 그의 세력들은 두려워해야 할지니, 기록된 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을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단 7:22) 하신 말씀도 있기 때문이다.

마귀에 의해 빼앗겼던 생명의 진리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시온에 오심으로 회복되었으며 때와 법을 되찾은 성도들은 그 진리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인 유월절이 폐지되고 이방 신의 축제일이던 이스터와 그리스도의 부활절을 혼합한 새로운 부활절(춘분 후 만월 다음의 첫 일요일)을 정했으므로 그들은 이 논쟁을 ‘부활절 논쟁’이라 부르며 과거 동방교회에서 마치 부활절을 1월 14일에 지켰던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어디까지는 그들의 관점일 뿐이다. 진리책자 ‘하나님의 비밀과 생명수의 샘’에는 이 내용을 ‘유월절에 대한 쟁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본란의 주제를 ‘니케아 회의와 유월절 논쟁’이라고 정하게 된 것이다.

현재 세상에 남아있는 교회사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진리교회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변개시킨 불법자들이 그들의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교회사를 읽을 때에는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살펴야 할 것이다.

어그러지지 않고 그대로 기록된 교회사로서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성경뿐이다. 진리는 절대적으로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지키는 유월절과 무교절, 부활절 … 등 모든 진리는 예수님과 사도들에 의해 기록된 온전한 교회사인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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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 세계에서 초대교회 예수님께서 새워주신 새 언약 유월절을 성경의 가르침대로 성력 1월 14일 저녁에 지키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유일합니다.



2012년 9월 11일 화요일

그리스도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그리스도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야' 에 대한 헬라어 호칭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기름부음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성별(聖別)하신 자 - 선지자, 제사장, 왕 - 임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확인시키는 의식이기도 했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임명하시는 임명식이기도, 취임식이기도 했는데 기름부음에 사용했던 기름은 주로 감람유(올리브 기름)였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였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였으며, 자신을 대신할 선지자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왕상 19:15~16)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이스라엘 왕을 세울 때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으며(삼상 10:1) 다윗에게도 기름을 부어 장차 이스라엘을 이끌 지도자로 예비하였습니다(삼상 16:12~13).

사울이 죽고 난 후 다윗이 왕위에 오를 때에도 기름부음을 받았고(삼하 5장 3절), 솔로몬도 왕이 될 때에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왕상 1장 39절).

이처럼 특정한 목적을 위해 임명하는 자들에게 기름을 부었는데 그들의 활동은 정해진 기간 동안만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야)로서의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 사상’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메시야가 아니라 권세와 영광을 가지시고 모든 민족을 통치하실, 그리고 유다 민족을 열방 위에 뛰어나게 해 주실 메시야였습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야) 곧 왕’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는데(단 9장 25절) 그 메시야가 곧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름부음 받은 자(그리스도)이심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친히 증거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를 읽으셨는데 그 인용한 말씀이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눅 4장 18∼21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그리고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동네의 우물 곁에서 만난 여자와 대화하실 때, 사마리아 여자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님 태어나시기 수십 년 전부터 로마에 의해 억압받으며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는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줄, 그리고 무거운 세금 부담을 줄여줄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서도 영향을 받은 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눅 24장 21절) 하였고, 예수께서 승천하시던 날에도 예수께 묻기를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장 6절) 하였습니다.

사도들이 비록 초기에는 예수님을 정치적인 해방자로서의 그리스도로 깨달았지만 얼마 후에는 죄악의 종노릇하고 있던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임을 깨달았고, 또한 그리스도는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사도 도마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으므로 믿지 못하겠다고 하였다가 며칠 후에 자신의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장 28절) 라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장 20절)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어떤 이들은 선지자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깨달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서에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하였습니다(골 1장 13∼18절).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인간들과 똑같이 육체를 입고 오심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자들과 그렇지 않는 자들을 구분하셨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장 12절) 한 사도 요한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깨달은 자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으니 그를 영접하는 자는 영원토록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발견한 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을 얻은 자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장 14절)하고 말씀하신 그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때에 또다시 외치십니다.

계 22장 17절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성경의 예언대로 마지막 이 시대 성령과 신부이시며 이땅에 그리스도로서 친히 임하신 아버지 안상홍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영접하시어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교회인 하나님의 교회에서 아버지 안상홍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께서 값없이 공로없이 허락해주시는 생명수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자녀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http://www.watv.org/
패스티브닷컴 http://pasteve.com/


교회사와 구원자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교회사와 구원자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BC 4년 로마제국의 호적령(가이사 아우그스도)

              예수님 성탄

AD 27년 예수님 침례(30세때, 세례요한)

AD 31년 예수님 십자가 대속(새언약 유월절 진리 세우심 3년 사역)

AD 70년 로마에 의해 이스라엘 패망

AD 96년 성경 기록 마침

AD100년경 안식일이 로마교회에서 부터 변질 시작

AD 150년경 유월절이 로마교회에서부터 변질 시작

AD 155년경 최초 종교회의(니케아) 개최

................1차 유월절 논쟁

................아니케스터(로마교회)와 폴리갑(서머나교회)의 논쟁

이미 로마의 서방교회에 의하여 안식일(일곱째날 토요일)이 일요일 예배일로 서서히 변개되기 시작하였고, 그 후 안식일과 유월절을 지키는 동방교회를 이단자들로 치부.


AD 197년 2차 유월절 논쟁(니케아 종교회의)

.............로마 교황 빅터(서방교회)는 도미닉규칙(부활절-춘부기준의 첫주일)

.............을 채용하도록 전 교회에 강요. 이를 거절한 동방교회를 책벌.

.............빅터(로마교회 감독)와 폴리크라테스(에베소교회 감독)의 논쟁

AD 220년 칼리스투스 "교황"이념 제시

AD 273년 로마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12월 25을 '불패의 태양 탄생일'로 국경일 선포

AD 312년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 황제 콘스탄틴 기독교로 개종

AD 313년 로마 황제 콘스탄틴은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 공인

AD 321년 로마 콘스탄틴은 "한주간의 첫째날은 존엄한 태양의 날이므로

.................휴업하라"는 [일요일 휴업령]을, 유대인의 일주일제도를 도입

.................첫째날을 태양의 날(SUN DAY)이라 명명하고, 로마의 우세했던

.................미트라교(태양신)도를 배려[일요일은 예배의 날]로 법령화.

.................안식일 예배 폐지

.................이것이 오늘날 달력의 요일제도의 구체적 이름을 갖게 됨.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 주의 첫날이 일요일로 되어 있고 이 일요일이 휴일이 된 것은 로마 황제의 불멸의 태양숭배 사상속에 태양신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한데서 비롯 [예배일인 일요일]이 바뀌는 것을 피하였기때문

AD 325년 3차 니케아 종교회의 개최

.............로마 콘스타티누스 황제가 서방교회(주일 중시-일요일)편을 들어

............."부활절"을 동방교회(유월절 기준)와 달리

.............춘분(3월 21일)다음에 오는 보름 후 첫주일로 정하고,

.............유월절을 폐지

AD 325년 성전에 십자가를 붙이기 시작.

AD 354년경 로마 서방교회에서 12월 25일을 참 빛이시며 정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지키기 시작.

 ...............로마 사투르날리아라는 농경신인 "세턴의 제일"이며, 로마의 동짓날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일"이 12월 25일로 로마의 큰 축제

AD 431년 교회와 사무실 안에 십자가 도입. 마리아상 도입.

AD 440년 레오1세가 교황의 개념을 확립 로마주교를 교황이라 칭함

AD 538년 교황권 확립(동고트 멸망)

AD 586년경 뾰족탑(지붕위)에 십자가를 세우기 시작.

5세기경 카톨릭은 유대의 필로의 분류(십계명 출 20:8-)를 그대로 지키다가

............성 아우구스티노의 분류를 지키기 시작.

6세기경 로마교회는 십자고상(그리스도가 세겨진 십자가)를 재가

............이후 개인집마다 하나의 십자가를 지니도록 함

AD 727년 성화상 숭배 논쟁

AD 825년 성화상 숭배 승인

AD 1252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발표한 '박멸에 관하여'라는

...............이단 박해명령 문서가 이후 종교재판소의 기초 문서로 전수

...............로마교회의 가르침을 반대한 사람들을 이단시

AD 1572년 파리에서 성 바돌로매의 축제일에 십만명의 이단자들을 소탕

...............교황청에서는 이 소식에 크게 기뻐함.

AD 1789년 미국 워싱턴 대통령이 12월 26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

...............추수감사절은 영국의 청교도들의 신대륙(미국)에 건너간 해에.

..............첫 추수한 곡식과 칠면조로 감사기도를 드렸던 관습에서 유래

...............AD 1620년


*

11세기경 십자군 원정 시작(1096년 이후 200년간 수차례 원정)

14세기경 카톨릭 교회의 분열

1515년 로마 카톨릭 레오10세가 성 베드로 성당의 개축 비용을 위해 면죄부 판매

1517년 마르틴 루터(독일)의 종교개혁(선행보다 믿음으로 구원), 95개조 반박문

1534년 성공회 설립(영국의 헨리 8세)

1535년 장 칼뱅(프랑스)의 종교개혁, 미사 폐지, 교회제도 정비

1545년 트리엔트공의회(45-63)에서 카톨릭의 정통성 주장, 종교재판소 설립
16세기경 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부터 금요철야예배시작

AD 1560년 장로교 설립(스코틀랜드, 칼뱅-장로회 제도:장로들에 의해 치리)

AD 1609년 침례교 설립(영국, J.스미스)

AD 1739년 감리교 설립(영국, 요한 훼슬리:감독이 관할)

AD 1834년 예수 재림 운동(윌리엄 밀러,1844년까지 10년간)

AD 1844년 제7일 안식일교회 등장(미국, 여선지자 엘렌지 화잇)

AD 1872년 여호와증인 설립(럿셀)

AD 1882년 장로교 국내 입교(19C말, 고종황제시대)

AD 1884년 감리교 국내 입교

AD 1890년 침례교 국내 입교

AD 1901년 성결교회(일본, 키우만)

AD 1904년 제칠일 안식일교회 국내 입교

AD 1907년경 성결교회 국내 입교

..................독립운동가 33인의 한사람이었던 길선주 목사에 의해서
..................새벽기도 시작됨.

AD 1910년 에큐메니칼 운동 추진(세계교회운동,교회일치운동)

..............."집(oikumene)"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

AD 1912년 여호와증인 국내 입교

AD 1918년 안상홍님 성탄(일제강점기 시대)

AD 1929년 바티칸 시국 성립(라테란 조약)

AD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AD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 종료(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AD 1948년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이스라엘 독립과 재림 그리스도의 등장)

...............안상홍님 침례(30세) <- 다윗의 위(40년) 예언

...............암스테르담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실인 세계교회협의회(WCC)발족    

AD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구성

AD 1964년 하나님의 교회 설립(안상홍님)

AD 1984년 안상홍님 마지막 유월절 집례

AD 1985년 안상홍님 승천(2월)...재림 37년 사역 마침
 

2012년 9월 8일 토요일

초기그리스도인들의 역사와 박해3 - 하나님의교회,어머니하나님,안상홍님

초기그리스도인들의 역사와 박해3 - 하나님의교회,어머니하나님,안상홍님


Ⅲ. 3차 박해기간 (A.D.249-313)

제 3차 박해기간 동안에는 부분적으로 일어난 2차 박해와는 달리 제국 전역에서 진행되었다. 전국적인 박해가 발생한 것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중에서 주요한 원인 5가지를 든다면 (1)기독교의 급속한 성장 (2) 제국의 경제 및 도덕의 쇠퇴 (3) 로마제국 창립 1000주년의 임박 (4) 교회는 국가내에 국가이며, 따라서 로마제국의 위협적 존재라는 로마 지도자들의 견해 (5) 로마의 쇠퇴가 로마신들이 기독교의 성장을 싫어했기 때문에 내린벌이라는 견해를 들수 있다.


1. 데시우스 칙령과 전국적인 박해
250년부터 251년 사이 데시우스 황제 아래서 기독교가 그 때까지 직면했던 박해 가운데 가장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다. 250년 데시우스 황제는 지방관료와 행정관들에게 정해진 날에 필요한 장소에서 제사를 총괄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제사를 드린 사람들에게 제사 증명서인 리벨루스를 발급하였다.

데시우스의 명령앞에 교인들은 순응, 타협, 거부, 도피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이떄 로마 교회 감독 코르넬리우스, 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더, 안디옥의 감독 바빌라스가 순교했다. 그러나 데시우스의 극심한 박해는 다행히 오래가지 못했다.

제국을 통치한 뒤 2년이 못되어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었고 갈루스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데시우스의 전사후 잠시 박해가 중단되었지만 갈루스가 들어서면서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갈루스도 황제의 자리에 오른지 2년이 채 못되어 제거되고, 발레리안이 아들 갈리에누스와 함께 황제가 되었다.
기독교인에 대한 발레리안의 태도는 이례적일 만큼 우호적이었지만 그의 통치 말엽에 257년부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의 재산을 몰수 하고 목숨까지도 빼았았다. 발레리안의 박해때에 프리스쿠스, 말쿠스 그리고 알렉산더 세 사람이 사나운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다.

발레리안이 죽은후 그의 갈리에누스가 황위를 승계하였다.그는 말씀의 사역자들이 자유로이 직무를 수행해도 좋다는 칙령을 발표한 후 43년간 평화가 따랐다.이 기간은 전에 찾아 볼 수 없을 만큽 기독교는 성장했으며,아름다운 교회가 건축되었다. 뿐만아니라 영향력있고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동시에 경제,군대,사회적 조적이 놀랍게 발전했다.


2. 디오클레티안 황제 박해
데시우스와 발레리안의 시대가 지난 뒤 이미 권력을 획득하고 있었던 디오클레티안이 황제가 되면서 박해는 또 다시 시작되었다. 그의 통치 초기 교회는 매우 급속이 성장하였다. 그러나 시벨레를 섬기는 이교도이자 기독교를 미워한 그의 모친 영향을 받아 교회에 박해를 가해기 시작했다.

 전국에 칙령을 내려 교회들을 부수고 성경을 불태우며 신자들의 직책들을 박탈하고, 교회 성직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어떻게 해서든 제물로 드리게 했다. 디오클레티안의 박해는 제 3차 박해 기간 동안 가장 길고 무시한 박해였다. 이 기간동안에도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했다.

니코메디아에 교회를 박해하는 황제의 칙령이 발표되자,훌륭한 가문 출신이며 직위도 존경을 받던 사람이 " 거룩한 열정과 뜨거운 믿음으로 인해 분기하여" 나붙은 칙령을 떼어내어 조각내 버렀다. 그일은 모든사람에게 알려졌으며 " 대담한 행동"을 한 그 사람은 영혼이 떠나는 순간까지 평정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디오클레니안의 박해는 305년 황제직을 사임한 후 잠시 중단되었으나 곧 재개되어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이 있을때까지 계속되었다.


3. 갈레리우스 황제 박해
디오클레티안 사위 갈레리우스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도 박해가 발생하였다. 사정없이 교회를 핍박하던 갈레리우스는 8년이 되던해부터 박해를 완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은 그의 중병때문이었다. 그의 몸에는 종양이 생기며, 창자속이 곪게 되었으며 그의 몸에는 지독한 악취가 나게 되었다. 투병이 계속되면서 갈레리우스 황제는 자신이 경건한 사람들을 대적하여 범한 죄에 대한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제는 먼저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무엇보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자백하게 되었다.드디어 갈레리우스 자신의 병이 기독교를 핍박했기 때문에 왔다는 기독교인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즉시 기독교 박해를 중지하라는 관용의 칙령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관용의 칙령가운데에는 기독교인들은 서들러 교회를 재건하여 예배를 드리며 제국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갈레리우스의 황제를 기점으로 박해는 약간 완화되었으나 기독교인들의 박해가 완전히 종식된 것은 콘스탄틴 황제에 와서이다.



Ⅳ. 콘스탄틴 황제와 기독교 공인

콘스탄틴은 A.D288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가 죽은후 그의 부하들이 콘스탄틴을 후계자로 임명한후 제국에는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콘스탄틴은 맥시미안의 딸 파우스타와 결혼하여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시켰다.

312년 콘스탄틴은 "이교적 마술을 의지"하고 있던 막센티우스를 로마의 권좌에서 축출하기 위해 위해 이탈리아로 행진했다.

 밀리안 전투 하루전 대낮에 콘스탄틴은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하늘에서 승리의 십자가 표시를 보았고 그 위에는 " 이 표지를 정복하라"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이 승리의 표시가 태양신이 보내신 것이라고 확신한 콘스탄틴은 만약 전투에서 이긴다면 태양신의 전사가 되겠다고 서약앴다. 다음날 콘스탄틴의 군대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동방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있었다. 305년 디오크레타안이 막시미안과 함께 퇴위한후 갈레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자리에 차지했다. 갈레리우스는 307년에 그의 친구이자 동료 군인인 리키니우스를 일리리아와 마케도니아를 통치할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했다.

리키니우스는 정지적인 야심을 갖고 콘스탄틴과 동맹을 맺고 콘스탄틴의 누이를 아내로 맞았다.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밀란의 칙령(THE EIDCT OF MILAN)이라 알려진 것을 공표했다. 이 밀란의 칙령은 공식적으로 교회에 종교의 자유를 선표한 최초의 선언이었다.

핍박받으며 음성적으로 활동하던 기독교가 밀란의 칙령으로 공식적인 자유를 허용받은 셈이다. 콘스탄틴 대제가 밀란의 칙령을 발표한 결정적인 이유는 전년도에 있었던 밀비안 다리 전튜에서의 승리때문이었다. (단순히 기독교를 정복하기 위해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다.)


Ⅴ. 요약 : 교회 생활의 변화
기독교는 많은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가 되어 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해왔다. 핍박이라는 기독교 장애물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애버리트 퍼거슨이 지적한 것처럼, "순교는 종종 기독교로 관심을 이끌고 선전도 하는 공개적인 광경이었다. 2세기의 기독교 변증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맞이한 방식은 그들에게 기독교의 진실성을 확신시켰다고 증언했다. 터튤리안의 대담한 선언- "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은 격언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된 후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기독교 공인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박해받는 지하종교에서 공인된 종교로 바뀌었고, 그결과 외형적으로 상당히 확산되었다. 새로운 교회 건물이 들어섰고 교회는 국가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자연히 정교의 밀착이 이루어졌고,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이 상실하면서 교회에는 세속화 현상이 발생하였다.예배의 형식이 영적인 성도의 교통에서 외형적인 형식 위주의 예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중심의 종교로 자라나게 되며 정통을 중요시 하게 된것이다.

※박용규, [초대교회사] (총신대출판부,1996), 69-113쪽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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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보다 중요한것은 하나님의 말씀인것이다.
이러한 픽박과 박해의 시대를 거쳐 교회는 세속적이 되어 버렸고 초대교회 하나님의 교회 진리는 변질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변질된것이 오늘날 교회의 정통으로 자리매김을 함으로 인해 오히려 변질된 교리가 참진리인양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처음으로

초기그리스도인들의 역사와 박해2 - 하나님의교회,어머니하나님,안상홍님

초기그리스도인들의 역사와 박해2 - 하나님의교회,어머니하나님,안상홍님


Ⅱ. 2차 박해 기간 (A.D 98-249)

2차 박해 기간(트리얀 황제 A.D98-117 ,안토니우스 피우스 A.D.138-161)동안에는 박해는 지역에 따라 국부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더라도 그에게는 신앙을 부인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 특징이라고 할수 있다.


1. 트라얀 황제치하의 박해
트리얀의 칙령에서는 네로와 같이 임의적인 박해를 가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칙령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 첫째는 의도적인 색출은 금한다는 것과 둘째는 익명의 고소는 정부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 그리고 셋째는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현재 아니라면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칙령으로 인해 혹독한 박해는 어는 정도 완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 잡아들이기 " 위한 수색은 금지되었다.


2. 하드리안 통치의 박해
하드리안은 125년경 아시아의 총독 미누시우스 푼다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독교인을 처형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 하드라인의 칙령은 비기독교인들로부터 근거없는 모함을 받는 것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합당한 법적 절차가 있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며 , 그 재판도 분명한 증인과 증거들이 확보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의 박해
'명상록의 저자'이며 스토아 철학의 대변자인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을 나타내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첨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참혹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이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했으며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나왔다.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박해의 강도가 점점 심해졌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갖은 고문과 박해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다. 이 박해로 인해 게르마니투스라는 독실한 청년이 순교했다.

지방 총독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본성적인 두려움을 극복하였다. 게르마니쿠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어 마침내 이 불의하고 무법한 세대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박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강화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레릴우스 황제치하에 폴리갑이 서머나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 총독은 그에게 ' 맹세하시오. 그러면 당신풀어 주겠소. 그리스도를 비난하시오.'라고 재촉했다.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다.

' 나는 86년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왕 그리스도를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

이윽고 화형을 위해 마련된 도구들이 그에게 정착되었다. 그들은 그를 큰 못으로 말뚝에 고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이대로 두시오. 나에게 화형을 견뎌낼 힘을 주실 분께서는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니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에 ,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않는 축복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여기 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가납될 만한 제물로서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 성자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폴리갑에 이어 165년 대표적인 변증가 저스틴도 순교의 대열에 합류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통치기간인 177년 심한 박해가 고울지방에서 일어았으며 이후 250년까지 박해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그후 막시미누스 통치 3년후에 간헐적으로 진행된 박해이후 평화가 잠시 도래하였다. 박해가 중단된 기간은 복음전파를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 3세기 50년동안 수천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공동체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50년에 데시우스 황제가 들어서면서 3차박해가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계속

초기그리스도인들의 역사와 박해1 - 하나님의교회,어머니하나님,안상홍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와 박해1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 왕 그리스도를 모독할 수 있겠는가?" -폴리캅-

고대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은 원인이 "무신론과 식인풍습, 근친상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이 핍박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로마 제국의 수호신이라고 믿고 있던 황제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곧 로마 제국의 안녕을 위협하는 반 국가적인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자연히 로마의 재난이 발생할 때 마다 기독교인은 비난의 대상의 되었으며, 사자들의 밥이 되었다. 이와같은 박해의 시작은 네로 황제때부터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 두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초대 교회 박해는 크게 황제의 고의에 의하여 시작된 1차 박해기간(약 A.D.64-96), 지엽적,국부적으로 진행된 2차 박해기간(약 A.D.98-249)그리고 전국적으로 박해가 진행된 3차 박해기간 (A.D.250-313)으로 대별할 수 있다.


Ⅰ. 제 1차 박해기간(A.D.64-96)


1. 네로 황제 박해
네로 황제가 재임하던 주후 64년에 발생한 대화제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 잊을 수 없는 분기점이 되었다. 그가 통치하던 주후 64년 네로는 로마에 발생한 대화제 사건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린후 극심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반들에게 기독교가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네로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수에토니우스(syetibius)가 기독교인들이 형벌을 받은 원인을 기술하면서 " 새롭고 사악한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단체인 그리스도인들 "이라는 표현속에서 찾아볼수 있다. 또한 타키투스도 기독교를 가리켜 "매우 위험한 미신 " 표현에 비추어 볼 때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를 옳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대화제 사건은 한 인간의 광적인 잔학성을 충죽시키기 위함이었다. 타키투스는 그의 연대기에서 광적인 잔학성을 충죽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유세비우스도 네로의 '극단적인 광기' 때문에 그의 생모와 아내 , 수천명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통치권을 확고히 다진 네로가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을 대적하여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타기투스의 연대 , 로마의 클레멘트 <고린도에 보낸 서신 > ,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의 설교를 통해서 네로의 잔학성과 하나님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을 알수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짐승의 가죽으로 싸서 개들에 의해 찢기우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 . 혹은 화형이 되어, 해진후 밤을 밝히는 일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네로는 그 광경을 위해 자신의 정원들의 개방하고 자신은 기수의 복장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아니면 마차를 몰고 다녔고 그동안 서커스에스는 쇼가 공연되었다. 그러므로 가혹하고 본보기적인 형벌을 받기에 마땅한 범죄자들이라 할지라도 사람들 사이에 동정심이 생긴 것은 사실상 그 일이 공중의 선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광적인 잔학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 타기투스의 연대기 중에서)

"우리는 훌륭한 사도들을 면밀히 살펴보시다. 베드로는 한 두 번이 아닌 여러 번의 노력을 통하여 불의를 극복하였으며 따 라서 그의 증거는 영광의 자리에 도달했던것입니다. 열정과 노력으로 바울은 인내의 상을 받앗습니다.....바울은 동서에 복음을 전했을 때 그는 자신의 믿음에 합당한 고귀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로마의 클레멘트 고린도에 보낸 서신 5장 )

"당신은 이처럼 이 권면에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와 고린도에 심어 놓은 번영의 씨앗을 섞어 놓았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순교했다." (고린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의 설교중에서)


2. 도미티안 황제 박해
도미티안 황제는 모든 면에서 네로의 전철을 밝았다고 한다. 유세비우스는 네로와 도미티안의 박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그는 로마에서 상당히 많은 귀족들과 저명인사들을 부당하게 살해했고.....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하는 일에 있어 네로의 후계자가 되었고 " 또한 터툴리안도 도미티안이 네로와 " 동일한 일"을 행하려 했으며 " 잔인성에 있어서 실질적인 네로의 후계자였다"고 말한다. 도미티안 자신의 아내였던 도미틸라를 유배시키는 한편, 그의 집정관이었던 자신의 조카 플라비우스 클렌멘스와 그의 두 아들을 살해했다. 사도 요한이 말씀을 증거하였다는 이유로 밧모섬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2012년 9월 5일 수요일

원시 기독교2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원시 기독교2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마지막으로 니케아 회의 시대가 되겠습니다. 이 시대는 AD313년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을 통한 기독교 공인 시기에서부터 590년 그레고리우스 1세의 즉위시까지를 말합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604년 그레고리우스 1세의 죽음까지를 경계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계속되는 박해에도 그리스도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부하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3년 기독교를 승인하고, 회유하게 됩니다. 사실상 박해의 종결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데오도시우스 1세 때에는 드디어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집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로마는 다신교 국가로서 태양신 미트라를 섬기는 미트라교가 국교였다고 합니다.)


박해 중에는 신앙 뿐이어서 사실 신학적 논쟁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파들이 등장했지만) 그러나 박해가 끝나면서 교리 문제가 등장하고 신학자들이 많이 나왔으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입니다.


AD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1년에 일요일 휴업령을 내리고, 일요일을 거룩한 태양신의 숭배일로 제정하여 기독교의 예배일과 동일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통일되지 않은 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 세계 대회가 소집이 되었고, 근본 교리가 제정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고, 성만찬 일자와 아리우스파 등의 문제에 대해서 교계의 통일을 꾀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155년경과 197년경 서방과 동방간에 성만찬 일자 문제가 달랐으므로, 콘스탄티누스는 서방(로마) 교회의 손을 들어주어서 성만찬을 부활절에 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유월절에 성만찬을 행하던 것을 폐지) 다른 이유는 유월절이 유대교의 가장 큰 절기였으므로, 유대교와의 결별을 선언하기 위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명쾌한 이론가였던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임을 주장하여 삼위일체설을 반박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아타나시우스는 삼위일체설을 옹호하며 아리우스를 공격하였습니다. 결국 아리우스와 아리우스를 추종하던 자들은 일루리아로 추방을 당했고, 아타나시우스의 승리로 삼위일체가 확립이 되었습니다. 이 1차 세계 종교회의를 통하여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의 보호자' 로서의 입지를 확실히 굳혔고, 향후 기독교에 많은 영향를 끼치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 교회의 교권도 강화되었습니다. (황제의 배후로 인함)


세계 종교회의는 그 후 8차까지 열렸으며 많은 교리들이 수정되고 보완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수도원들이 건립되었고 금욕주의로 대표되던 헬라 철학의 스토아 학파의 금욕사상이 유입되어 수도사들은 금욕적 생활을 하게 됩니다. (유대교의 영향도 있었음)


또한 이 때 등장한 풍속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성화 숭배, 성자 숭배, 유물 숭배, 성모 숭배, 천사 숭배 등등이 있으며, 354년에는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풍속이 등장하였습니다. 이 크리스마스의 기원은 로마의 3가지 축제인 새터날리아, 시길랄리아, 브루마리아 등입니다. 로마의 국교였던 태양신 미트라의 축일이기도 했던, 동지날입니다.


기독교가 국교로 된 후인 431년에는 십자가가 예배당 안에 걸리게 되었고, 586년에는 교회 꼭대기에 세워졌다고 하는데 모두 다 이 시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니케아 회의 시대에는 외형적인 박해는 없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교리적 박해가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리의 변질)

원시 기독교 형성 과정을 대략 적어 봤습니다. 사도 시대는 기독교 기반 형성, 사도후 시대는 박해 속에서의 신앙과 분열의 조짐, 니케아 회의 시대는 박해의 종식과 평안, 그리고 교리의 변질이라는 말로써 대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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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를 모르고선 초대 하나님의교회 진리를 고수 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어떤 배경으로 초대 하나님의교회 진리가 변질이 되었는지 올바로 알고서 그에 합당한 믿음의 길을 걷고 신앙생활을 해야지만이 구원으로 나아갈수가 있게 되겠습니다.
어머니하나님과 안상홍님께서 회복해주신 초대 하나님의 교회 진리를 성경을 통하여 역사를 통하여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시기는 참이 거짓인양 감추어 버리고 거짓이 참인양 내세우는 마귀의 훼방이 심한 시대입니다. 성경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셔서 영원한 구원이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영생얻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처음으로

원시기독교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원시기독교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원시(原始/元始)

[명]①시작하는 처음. ②처음 시작된 그대로 있어 발달하지 아니한 상태. ¶원시 신앙/원시 밀림 지역/다른 교우들도 얼마 되지 않은 가재 집물을 챙겨 팔아 변비한 두메나 심심산중으로 숨어들어 원시에 가까운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한무숙, 만남≫/짐승 껍질로 살갗을 가리는 원시의 상태로 인간이 환원하기를 원하지는 않으리라.≪유치환, 나는 고독하지 않다≫


원시 기독교라고 하면 '초대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서는 니케아 회의시대까지를 아우르기도 합니다.

먼저 교회의 역사는 고대, 중세, 근세, 최근세(현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대는 크게 사도 시대, 사도후 시대(속사도 시대), 니케아 회의 시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고대사의 시대 구분

고대사 (AD 1~590) :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시까지
 1) 사도 시대 (AD 1~100) :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의 활동이 끝날 때까지
 2) 사도후 시대 (AD 100~313) :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허락할 때까지
 3) 니케아 회의 시대 (AD 313~590) :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 즉위시까지



먼저 사도 시대의 특색을 살펴보면 기독교가 각지에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 소아시아, 로마 등) 그리고 이 시대에 신약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또 사도들이 순교하였고, 바울의 개종과 전도에 의해 세계 종교로 발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기원은 침례 요한의 출현과 예수 그리스도의 도성인신(道成人身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 그리고 그의 사역과 새 언약을 세움, 12제자 훈련, 오순절 성령 강림 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 조직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는 시기는 7집사 선정했을 당시입니다. 7집사는 스데반, 빌립, 니골라 등입니다.


사도 시대에 로마는 문화의 중심지로서, 편리한 교통망과 헬라어와 라틴어로 통용되어 전도에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분산으로 각지에 시나고그(회당)이 세워져 이것이 또한 전도에 활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도덕적 타락(노예 매매, 잔인한 풍속, 부모의 자녀 살해권 등)은 기독교 동경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종교 상태는, 잡신과 황제 숭배 등이 성행하였고, 철학 사상(헬레니즘)이 범람했던 시대입니다.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플라토니즘과 네오 플라토니즘 등입니다. 이 시대에는 특히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의 박해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가운데에 카타콤 생활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도들은 열심히 순교하며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AD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멸망은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유대교 총본산이 함락되었으므로 기독교가 유대교를 능가하게 되었고, 기독교인이 예루살렘 멸망 전에 각지로 탈출하여서 전도의 무대가 확장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시대는 요한의 사망 시기로 추정되는 100년 경(혹은 106년)까지로 계수합니다. 이 당시에는 유무상통이라 하여서,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와주는 공동체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 당시만 하더라도 건물로서의 교회는 설립되지 않았습니다. (유형의 건물이 없었음.)





사도후 시대는 '속사도 시대' 라고도 부릅니다. 혹은 니케아 회의 이전 시대라고도 부릅니다. 이 시기에도 온갖 박해가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전도 활동이 왕성했습니다.


이 시대는 또한 사상의 발표 시대라고도 합니다. 헬라 철학, 동방 종교, 유대의 율법주의의 이입으로 사상적 혼란이 왔던 것입니다. 특히 사도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그노시스주의(영지주의), 네오 플라토니즘(신 플라톤주의) 등 절충 조화의 사상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유명한 인물로는 클레멘스, 이그나티우스, 폴리카르푸스, 헤르마스, 이레니우스, 오리게네스 등이 있으며, 이때부터 분열의 조짐은 희미하지만 있었습니다.


155년경 폴리카르푸스와 로마 감독 아니케터스는 성만찬 문제를 놓고 대립하였습니다만, 서로 양편을 설복시킬 수 없어서, 서로 다르게 지키기로 합의했고, 197년 경에는 에베소 감독 폴리크라테스와 로마 감독 빅터가 논쟁하였고 빅터는 폴리크라테스를 파문시키기로 하였으나 반대에 부딪쳐 취소되었습니다. 기실 이때부터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조금씩 분열하는 조짐을 보인 것이었습니다.
(논쟁 주제는 성만찬 날짜 문제 : 닛산 14일의 유월절인가, 그 다음 일요일에 오는 부활절인가하는 문제)


또한 이 시기에 해당하는 3세기에 로마 제국 동방에서 마니교가 발흥하였습니다. 영지주의(그노시스파)와 비슷한 점이 있으나 그 근원이 동방이며, 서방으로 흘러와서 기독교와 접촉하고 기독교적 요소를 흡수하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이원론을 근거로 이 세계를 광명과 흑암의 투쟁 무대라고 해석하였으며, 13세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시기까지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사도 시대 박해 황제)의 박해를 포함하여 10대 박해가 있었습니다. 이 박해에 관한 것은 자세히 서술하지 않겠습니다. (너무 많아서)


계속

순교자 '폴리갑'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순교자 '폴리갑'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

폴리갑은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임명된), 아시아의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다. 기록의 미비로 인하여 그의 탄생이나 성장 과정 등에 대한 것은 알 수가 없지만,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가 변질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의 새 언약의 진리를 수호하고자 노력한 정신은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폴리갑'은 사도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으며, 사도들에 의해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폴리갑의 믿음과 유월절

그는 항상 자신이 사도들로부터 배운 것, 교회가 전해준 것, 그리고 참되고 유일하고 참된 신앙을 전파했다. 폴리갑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심지어 유월절로 논쟁을 벌였던 로마 감독이었던 '아니케터스(Anicetus)' 조차도 그를 존경하였고, 폴리갑이 사도 요한을 비롯한 다른 사도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켜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케터스는 폴리갑에게 더 이상 유월절을 지키지 말라고 권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유세비우스 교회사 297쪽)




폴리갑의 순교  

‘안토니누스(Antoninus)가 로마의 황제로 있을 때(제위기간 : 주후 138∼161년), 아시아 지역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폴리갑은 교회에 평화를 주시기를 밤낮으로 기도했다. 체포되기 사흘 전 그는 꿈 속에서 자기가 베고 자던 베개에 갑자기 불이 붙어 타버리는 환상을 보았는데, 꿈에서 깨어난 그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불에 타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그는 형제들의 간곡한 청에 의해 가까운 곳에 피신해 있었다. 그러나 박해자들은 그곳까지 쫓아왔다. 다락에 있었기 때문에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기에 도망치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쾌활하고 온유한 얼굴로 그들을 대했다. 폴리갑은 그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시켜서 대접했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만 방해받지 않고 기도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박해자들은 자기들이 그토록 체포하려고 열성적으로 쫓아다녔던 사람이 이처럼 훌륭한 노인이라는 사실에 놀랐기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을 허락하였다.

서머나 시로 잡혀간 폴리갑은 경기장으로 끌려나갔다. 총독은 ‘폴리갑'인가를 물은 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라고 종용하였다.

총 독 : 그리스도를 비난하시오, 그러면 당신을 풀어주겠소!
폴리갑 : 나는 86년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총 독 : 나는 사나운 짐승들을 준비해 두고 있소!,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당신을 그 짐승들에게 던져버리겠소!
폴리갑 : 그 짐승들을 부르십시오, 우리는 선을 버리고 악으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악에서 돌이켜 덕을 택하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총 독 : 만일 당신이 짐승들을 멸시하며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화형에 처하겠소!
폴리갑 : 당신은 잠시 붙었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장차 임할 심판과 악인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형벌의 불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지체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원하는대로 하십시오.


죽음 앞에서도 폴리갑은 확신과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의 얼굴은 은혜로 충만했다. 총독은 전령을 불러 ‘폴리갑이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했다' 고 선포하게 했다.
서머나에 있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성화로 화형장으로 끌려간 폴리갑. 화형을 시키기 위해 큰 못으로 그를 말뚝에 고정시키려 했을 때, 그는 당당했다.

“나를 이대로 두시오. 나에게 화형을 견뎌낼 힘을 주실 분께서는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능력도 주실 겁니다"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천사들과 천군들과 피조물,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이시여! 오늘 저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 앞에 가납될만한 제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 멘"

그가 ‘아멘'으로 기도를 마치자 집행인들이 불을 붙였다. 그러나 그의 육신은 불에 타지 않았다 그래서 박해자들은 그를 칼로 찌르라고 명령했다. 칼로 그의 몸을 찌르자 피가 솟구쳐 올라 불이 꺼져 버렸다. 결국 박해자들은 숨이 끊어져 고통을 잊은 그의 시체를 불에 태웠다고 한다.




우리의 교훈  
신앙의 자유가 없었던 암흑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끝까지 지키며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자부했기에 순교를 당한 폴리갑의 믿음의 생애는 우리들의 연약한 믿음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안상홍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앞서 걸어가시사 대로를 평탄케 해 주신 이 믿음의 길 위에서 두려울게 무엇이랴!
우리에게 닥쳐오는 온갖 핍박과 어려움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통,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없던 시대에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온갖 고문과 고통 속에 죽어간 순교자들의 고난에 족히 비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무엇이라 외쳤는가! 베드로, 요한, 바울 … 등 여러 믿음의 선진들의 신앙과 아울러 폴리갑의 믿음은 말세를 만난 우리들 신앙의 좋은 표본이다.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기 때문에 최후 발악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 믿음의 선구자가 되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먼저 믿음의 길을 걸어갔던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그리스도의 진리의 나팔이 이 세상에 울려 퍼지도록 힘껏 외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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