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역사) - 하나님의교회, 어머니하나님, 안상홍님, 김주철
기원전 753년 4월, 로마 왕국이 세워졌다.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공화국에서 다시 제국으로 변신을 거듭한 끝에 몰락한 로마는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지중해를 제패하여 서구인들의 공통된 뿌리가 되었다. 역사상 로마보다 큰 영토를 차지한 나라는 있었지만 로마만큼 여러 문명권의 수많은 나라들을 지배했던 강한 제국은 없었다.
유럽인들의 끝없는 향수, 로마
유럽 - 서방 선진국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알려진 이 지역은 일찌감치 국가적 통합 움직임을 보여왔다. 가까이는 2차 대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51년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와 베네룩스 3국이 모여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설립했고 이어 유럽경제공동체와 유럽원자력공동체가 발족했다. 이 세 단체는 개별 행정부와 입법부를 통합하여 다시 유럽공동체(EC)가 되고, 1990년대 들어 유럽연합(EU)으로 변모하면서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협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유럽 대륙을 하나로 묶어주는 정신적인 배경은 무엇일까? 이는 그들이 공통된 역사, 문화적 뿌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유럽은 2천 년 전 로마가 제패한 지역이다. 로마는 서구사상의 2대 원류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로마식으로 재구성하여 유럽 전역에 퍼트렸다. 그리스의 건축과 인간중심의 사고, 신 중심의 기독교 사상을 자기 스타일로 변용한 로마인들은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약 500년 이상이나 서양의 패자(覇者)로서 그 위세를 떨쳤다. 멸망 이후에도 로마는 법률과 로마 카톨릭, 패권주의 등 여러 가지 물질적·정신적 유산을 오늘날까지 남겼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많은 전리품과 배상금을 얻은 데다가 방대한 영토가 속주로 편입되고 패전국 백성들이 노예로 몰락하자 로마는 매우 부유해졌다. 그러나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매우 심화되어 귀족들은 값싼 노예 노동력을 바탕으로 대농장(라티푼디움)을 경영하여 부를 더욱 축적한 반면, 오랜 세월 군인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자작농(평민)들은 기반을 잃고 소작농이나 유민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자 기원전 2세기경 호민관에 당선된 그락쿠스 형제가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지만 정적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이후 100여 년간 로마 정국은 혼란을 거듭한다. 정적들을 학살하며 공포정치를 단행하던 마리우스, 술라 같은 독재자들이 모두 세상을 뜬 후 혼란기의 로마를 평정한 사람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는 당대 최고 부호였던 크라수스, 지중해 일대의 해적을 평정하여 명성을 높인 장군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고 일명 ‘삼두정치’를 실행했다. 그는 정치·군사적 재능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로마인들을 사로잡았다. 집정관에 당선된 기원전 59년에는 여러 개혁적인 법안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고 이어서 속주 갈리아의 총독으로 부임하여 기원전 50년까지 로마에 반기를 든 갈리아 부족들을 평정하여 무훈을 세웠다. 그 사이 크라수스가 사망하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대립하게 되자 원로원의 보수파들은 폼페이우스의 편을 들어 카이사르를 제거하려 했다. 무장을 해제하고 로마로 귀환하라는 원로원의 통고를 받은 카이사르는 심사숙고 끝에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폼페이우스는 쫓겨 테살리아로, 이집트로 패퇴했다가 암살당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왕실의 내분을 평정하고 자신에게 의탁한 클레오파트라 7세를 왕위에 복귀시켰다.
로마로 돌아와 종신 독재관이 되어 왕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장악한 카이사르는 공화파들에게 살해당했다. 이 혼란을 틈타 카이사르의 부장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잡고 암살자들을 몰아내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을 악티움에서 격파하고 로마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원로원은 내전을 종식시킨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를 바쳤고, 그는 스스로 로마의 ‘프린켑스(제1의 시민)’를 자처하며 공화정을 유지하는 척했지만 군의 최고 통수권자였고 호민관 특권을 가짐으로써 원로원의 의결도 거부할 수 있어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사망 후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후계가 결정되었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도 세습되었다. 종교적으로도, 카이사르 이래 로마 황제들은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국가 대제사장직을 종신토록 가지고 있었으며 죽은 뒤에도 황제는 항상 신격화되었다.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로마가 기독교를 정복했다”
로마는 전통적으로 다신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황제나 황후를 신으로 격상시켰으며 속주민들에게는 그들의 전통 신들을 믿는 것까지 허용하였으나 곧이어 큰 변화가 일어난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기원전 4년경, 이두메의 토후 출신 헤롯왕이 다스리던 로마의 속국 유대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다. 그가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것은 2대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 때였다. 그의 파격적이고 개혁적인 가르침에 반발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총독이었던 폰티우스 필라토스(빌라도)에게 예수의 처형을 요구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그의 부활과 승천을 믿는 제자들에 의해 이 새로운 종교가 로마 제국 내에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울이 유대교에서 개종한 뒤에는 그의 적극적인 전도여행으로 그리스와 소아시아 여러 도시, 그리고 로마 시까지 기독교가 퍼졌다. 기독교도가 제국 내에서 폭발적인 숫자로 증가하자 차츰 로마 황제들은 이들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로마에는 기독교도에 대한 그릇된 풍문이 퍼졌고 황제 숭배 거부로 처형당하는 기독교 지도자들도 생겨났다. 제5대 황제 네로 때에 이르면 기독교도들이 로마 시가지가 거의 전소된 대화재 사건의 주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과거보다 더 대대적인 박해를 받게 된다. 기원후 64년, 로마 시의 기독교인 수백 명이 체포되어 십자가형, 화형을 받거나 야수의 먹이가 되는 식으로 잔혹하게 처형되었다. 네로와 도미티아누스 등 몇몇 폭정으로 유명한 황제들이 기독교를 탄압했을 뿐 아니라 이후의 5현제 시대와 군인황제 시대의 혼란기에도 기독교 탄압은 종종 있었다. 112년경, ‘5현제’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황제 트라야누스도 소아시아 총독과 교환한 서신에서 “기독교도라는 그 자체만으로 처형할 수 있다”고 했을 정도다.
3세기 중엽 이후부터 탄압은 제국 전역에 미치고 정도도 점점 심해진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가 303년부터 가한 박해는 기독교도를 완전히 소탕하겠다는 황제의 의지가 반영되어 가장 극심했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탄압이 가해진 지 10년 만에 상황은 급반전한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가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다.
과거의 기독교 박해 정책은 기독교 우대 정책으로 바뀌었다. 로마의 대제사장인 황제가 기독교의 보호자를 자임하자 국비로 교회가 세워졌으며 기독교 성직자들에게는 재판권이 부여되고 세금과 부역이 면제되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믿었던 교회에는 황실 가족과 귀족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런 우대정책으로 불과 한 세기가 지나지 않아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된다(392).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해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했다”고 보는 역사가들도 있지만 실상은 “기독교가 로마에 정복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로마화된 기독교요, 로마의 종교였다. 황제 숭배를 그토록 거부했던 기독교인들은 황제가 ‘교회의 보호자’로 나서자 황제의 뜻을 전폭 수용했다. 황제는 여전히 로마의 최고 대제사장답게 종교회의를 직접 주재하며 교회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다양한 신들의 조각은 비슷한 모습의 성인상으로 대체되었고, 로마인들이 당황했을 때 ‘이런, 제기랄’ 이라는 뜻으로 유피테르나 헤라클레스 같은 신의 이름을 내뱉던 풍습은 ‘하나님 맙소사(Oh, my God)!’ 또는 예수(Jesus)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12월에 흥청거리던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크리스마스로 바뀐 것처럼 신들에게 제사하며 즐기던 로마의 축제일은 기독교의 축제일로 탈바꿈했다.
로마의 분열과 멸망
로마가 멸망한 것은 476년이지만 사실 이전부터 쇠퇴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3세기 중엽부터 군인황제들의 난립으로 크나큰 정치적 혼란을 겪은 데다가 경제적으로도 심각한 인플레가 계속되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신도시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고 방어가 용이한 그곳으로 수도를 옮겨버렸다. 사실 로마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이민족인 갈리아인들은 난을 일으켰고 사산조 페르시아와 싸움에서 발렌스 황제가 전사하는 등 군사적으로도 위기가 거듭되었다. 특히 용맹하기로 이름난 게르만족들은 4세기 후반부터 수시로 국경을 침입했다.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망 후에는 제국이 완전히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었다(395).
황제가 떠나버린 이후로 로마 시에서는 로마 주교의 힘이 막강해져 나중에는 동로마의 황제로부터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교황이 되고 로마는 종교적 중심지가 된다. 그러나 이탈리아 반도로 속속 남하하고 있었던 게르만족이 문제였다. 그들은 이전에도 가끔 제국 내부로 들어와 약탈을 일삼기는 했으나 일부는 로마군 용병으로 편입되거나 이주민으로 정착하기도 했었다. 375년, 게르만족들은 볼가 강을 건넌 훈족의 압박에 밀려 로마 국경을 넘어들어오더니 5∼6세기에는 아예 로마 제국 내에 임의로 독립 왕국을 세웠다. 결국 게르만족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제국은 멸망한다(476). 로마에는 롬바르드(북이탈리아), 프랑크(프랑스), 부르군트(남프랑스), 동고트(이탈리아, 동유럽), 서고트(에스파냐), 반달(북아프리카), 헤룰리(이탈리아), 수에비(포르투갈), 알라만(독일), 앵글로-색슨(영국) 등 게르만 왕국들이 속속 들어섰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제국은 ‘비잔틴제국’으로 불리며 1453년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했지만 더 이상 로마 제국의 영광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게르만 왕국들이 등장한 옛 서로마 지역은 로마 카톨릭이라는 종교권으로 새롭게 통합되었다. 특히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황과 손을 잡고 서유럽의 강자로 부상했으며 800년, 카를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관을 받아씀으로써 로마제국은 형식적으로 재건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은 프랑크 왕국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로 삼분된 후 한때 명맥이 끊겼으나 독일의 오토 1세가 다시 교황을 통해 황제의 관을 받음으로써 19세기초까지 내려오다가 소멸했다. 그 사이 서유럽에서는 많은 나라들이 패권을 다투었지만, 옛 로마제국의 실질적 지배자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로마 교황이었다.
로마의 유산 - 법, 무력에 의한 평화, 종교
16세기의 종교개혁과 19세기 이탈리아의 통일로 교황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이탈리아는 1차대전 때에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승리했으나 2차대전 때에는 독재자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독일의 히틀러와 연합하여 패전국이 되었다. 이탈리아 통일 후 정부와 대립하고 있던 교황은 2차대전 중 무솔리니와 라테란 협정을 맺었다. 이로써 이탈리아 로마 시 내부에 교황청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한 바티칸시국(市國)이 성립되었고 로마 카톨릭교회가 이탈리아의 유일한 국교임이 강조되었다. 1948년 공화국으로 새롭게 출발한 이탈리아에서도 이 협정은 그대로 유효했다.
뛰어난 법률과 건축, 막강한 군사력, 그리고 종교로 세계를 제패한 로마의 유산은 이탈리아와 바티칸의 교황청, 그리고 서구 세계 곳곳에 남아있다. 과거 로마인들이 건설한 다리와 건축물, 조각은 이탈리아 로마 시를 중심으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로마법은 서구 근대법의 기초가 되었다. 로마식 종교보편주의는 로마 카톨릭이 계승했고, 로마 제국의 상징 독수리는 유럽 각국과 미국이 앞다투어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다. 속주민들과 노예들이 그토록 얻기를 원했던 로마 시민권처럼 오늘날 미국 시민권이 그 위력을 발하고, 무력에 의해 이룩한 로마의 평화 ‘팍스 로마나’는 오늘날 미국이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이름으로 답습하고 있다. 과거의 로마제국은 현재 수십 개국으로 쪼개져 EU라는 공동체를 통해 다시 옛날의 영화를 회복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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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를 통해서 바라보았을때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초대 하나님의 교회가 로마의 억압정책에 의해서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리는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다신교가 당시 기독교와 혼입이 되면서 순수했던 초대 하나님의 교회 진리가 세속화 되고 변질 되어 버리고 패지되어 버린것이 오늘날까지 내려와 세상에 수많의 교회들의 정통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정 초대 하나님의 교회 진리를 그대로 회복하여 지키는 교회는 어디일까요? 성경을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정도의 길로 나아가 올바른 믿음을 회복하여야 신앙생활을 하는 최종목적인 천국에 온전히 입성할 수 가 있습니다.